그날, 미군은 왜 독도에 폭탄을 투하했나
다음 네이버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48년과 1952년에 벌어진 독도 폭격 사건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김예지] 한반도가 공식 분단된 1948년에는 홍수 피해도 심각했다. 을축년 홍수로 불리는 1925년 대홍수 이후 23년 만의 대홍수였다. 1948년 상반기에는 가뭄 피해가 심했다. 그러다가 7월부터 장마가 시작되더니 대홍수로 이어진 것이다. 그해 6월 13일 치 <경향신문>에 따르면, 장마 조짐은 6월 9일부터 나타났다. 오랜 가뭄을 해소하는 비가 9일부터 내리더니, 12일 아침까지의 강우량이 162mm가 되고 한강 증수량도 4m나 됐다. 가뭄이 끝나기 하루 전날인 6월 8일, 한국인들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들에 깜짝 놀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갑지 않은 것이 그날 하늘에서 마구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바로, 독도에 투하된 폭탄과 총탄이었다. 이날 대대적인 독도 폭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해 6월 12일 치 <동아일보> 보도다. "동해의 고도, 독도에서 어선이 폭격을 받아 20여 명이 사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8일 울릉도로부터 39마일 떨어진 무인도 독도에서는 미역 따는 어선 15척이 본토와 울릉도로부터 모여들어 작업 중, 정오경에 이르러 상공에 나타난 비행기로부터 폭탄과 기관총의 세례를 받아 11척이 침몰하고 9명이 사망, 5명이 행방불명, 중상 2명, 경상 8명이란 큰 희생을 내었다 한다." 태극기 흔들었지만 속수무책... "초록빛 독도 앞이 피바다 됐다" ▲ 1948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이 신문에서는 사망자가 9명이라고 했지만, 6월 11일 치 <조선일보>는 16명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는 훨씬 컸다. 이때만 해도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사건의 내막이 충분히 알려지고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나온 1999년 10월 11일 치 <한겨레신문>은 150명이라고 보도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