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눈 내려도 아무도 안 치우는 서울.. 주민 동원해 싹 치우는 평양

https://news.v.daum.net/v/20181201030211675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8.12.01. 03:02

지난 토요일 아침 갑자기 서울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그날 북한산 부근에서 조찬 강연이 잡혀 오전 7시에 경호원들과 집을 나섰다. 그때만 해도 눈이 약하게 내려 별일 없었는데 청담대교에 들어서니 폭설로 변해 차가 속력을 낼 수 없었다. 강연 시작은 오전 8시였는데 차가 북한산 부근에 들어선 때가 오전 7시 40분경이었다. 게다가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높은 언덕에 있는 강연 장소까지 차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결국 차에서 내려 경호원들과 가방을 메고 경사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구두가 다 젖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와 있는 사람이 2명밖에 없었다. 얼마 후 주최 측에서 택시와 버스가 눈 때문에 북악터널에서 꼼짝없이 막혀 있어 강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 강연은 무산됐다.

오전 9시쯤 밖으로 나와 보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발을 옮길 수 없는 상태인데도 눈 치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서 접촉 사고가 나고 차들도 꼼짝 못했다. 당연히 모든 책임은 폭설을 제대로 예보하지 못한 기상청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파트 주변 거리에 눈이 쌓였는데도 눈 치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문득 눈 오는 날 평양 거리가 떠올랐다. 북에선 눈이 예고 없이 많이 왔다고 시내가 마비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일기 예보가 정확해서가 아니다. 평양시는 청소 담당 구역에 따라 시내를 바둑판처럼 쪼개고 각 구역을 인민반(한국에서 통 단위와 비슷)으로 나눴다. 눈 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오전 6시에 일어나 집 주변과 길거리를 말끔히 다 치워야 한다. 인민반장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눈 치우러 나가자고 문을 너무 쾅쾅 두드려 그대로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눈 오는 걸 예견 못 하고 전날 저녁 친구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늦잠을 자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큰 낭패다.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면 아내라도 나가야 한다. 어느 집이 나오고 안 나오는지 인민반장이 다 체크한다.

평양 주민들의 이런 문화에 제일 감동한 사람이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다. 눈이 많이 오는 나라에서 온 스웨덴 대사는 눈만 오면 전체 평양시민이 새벽부터 일어나 말끔히 눈을 치우는 걸 보고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다. 하루는 내게 "어떻게 조선 사람들은 눈만 오면 다 나와 깔끔하게 치울 수 있는가. 스웨덴도 눈이 많이 오는데 집 앞 눈도 치우지 않는다. 비결을 좀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눈 치우는 담당 구역이 미리 정해져 있고 새벽부터 주민을 동원한다고 말하기가 좀 뭣해서 "조선 민족은 원래부터 눈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부지런한 민족"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대사는 "그렇게 부지런한데 왜 못사느냐"고 되물었다. "미국 놈들 때문에 국방비에 너무 많은 것을 지출하다 보니 못산다"고 답변하니 그가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내 설명에 이해가 가서 그랬는지 어이가 없어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이 한국보다 못사는 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무슨 문제든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해결하는 북한식 동원형 행정 때문인 것 같다. 국가의 행정 목적이 복리 지향형이어야 하는데 북한은 전시 동원형 행정이다.



한국 언론들이 토요일 갑자기 눈이 왔다고 아우성치는 걸 보고 북한 신문을 찾아봤다. 첫눈이 온 지난 토요일 노동신문은 기사에서 이렇게 평양시의 풍경을 묘사했다. '평양에 첫눈이 왔다. 설경이 펼쳐진 대동강변에 기쁨의 웃음이 넘쳐난다. 만단(萬端) 사연을 속삭이며 내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느라니 가슴 벅찼던 뜻깊은 날과 날들이 쩌릿한 감회 속에 되새겨진다. 송이송이 춤을 추며 내리는 첫눈을 맞으며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의 얼굴마다에도 이해의 행복 넘친 나날들에 대한 추억과 함께 더 좋을 래일에 대한 끝없는 환희가 넘쳐흐른다.'

토요일 새벽 모두 일어나 눈을 치웠을 평양 주민들이 생각났다. 과연 그들에게 눈이 오는 날은 기쁨의 웃음이 넘쳐나는 날일까. 서울에서 올해 첫눈을 맞으면서 몇 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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