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산재 심사를 앞둔 문석호씨가 8일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문씨의 정신적 고통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홍인택 기자
‘문화서비스 팀장’에서 ‘해고자’로, ‘청소파트 근무자’ 였다가 ‘영화관 티켓 발행 근무자’로….
여러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대형 리조트에서 31년간 일하다 지난해 1월 전남 구례군 구례클러스터(현 오가닉클러스터)에 팀장으로 입사한 문석호(58)씨 한 사람 이야기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빈 책상’ 대기 근무ㆍ2개월 정직 등을 거친 문씨에게 회사는 구례에서 200㎞ 이상 떨어진 냉동창고 물품 분류 근무자로 가서 일하라며 발령을 냈다.
“직원이 도구가 아닌 동반자인 곳”
문씨가 겪은 고초는 그가 일터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이끈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지만, 노조를 만들고 나서 극한으로 내몰렸다. 계속되는 징계와 고소ㆍ고발로 불안장애를 진단받았고, 불면증으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청하지 못한 지 1년이 넘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16일 문씨의 “죽고 싶을 만큼 힘겨운 고통”을 업무상 발생한 질병으로 인정했다. 산재 신청 일곱 달 만의 일이다.
구례자연드림파크 내 작업장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례자연드림파크는 대표적인 소비자협동조합인 아이쿱 생협이 기획하고 설계한 농공단지다. 14개의 아이쿱 협력업체가 김치, 라면, 과자, 우유 등 식품을 생산해 아이쿱 로고를 붙여 유통한다. 새 직장을 찾던 문씨의 눈에 구례자연드림파크가 들어온 데도 ‘아이쿱’ 이름값이 한몫했다. ‘iCOOP생협에 지원하게 된 동기를 서술하시오.’라는 자기소개서 문항에 문씨는 “직원을 도구가 아닌 동반자로 성장하는 곳”, “공존하는 희망이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썼다.
실상은 자기소개서 속 희망과 달랐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아이쿱 생협의 ‘점간 이동’ 정책이 발단이었다. 생협은 ‘신규개설 및 소규모 부진매장’의 경영 안정화를 명목으로 과일ㆍ채소와 신선식품, 정육 제품 등의 재고를 ‘안정화 매장’으로 옮기고 여기서도 남겨진 재고는 식자재로 활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지난해 3월 실시된 아이쿱 생협 내 '점간 이동' 정책으로 각지 생협 매장에서 남은 재고 식자재가 구례자연드림파크 식당으로 옮겨졌다. 상당수는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오른쪽)였다.
그러나 각지에서 쏟아지는 재고 물품을 식당 한 곳에서 처리하기는 무리였다. 하루 20상자씩 들어오던 식자재가 80상자 이상으로 늘었고, 두 번이나 재고로 남겨진 물품이라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당시 식당 매니저 이순규(55)씨는 “재료를 선별하고 반품하느라 매일같이 잔업을 해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일손은 그대로인데 업무량은 늘어나 같은 회사 소속 청소노동자까지 식자재 분류 작업을 도와야 했다. “우리 직원들은 ‘쓰레기’만 먹는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사측은 이에 대해 “친환경 재료의 비율을 90% 이상으로 높이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라고 밝혔다.
“회사는 우리를 범죄집단으로 몰았다”
지난해 5월 사측은 ‘점간 이동’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문씨를 팀장 직위에서 해제하고 청소 업무에 배치했다가 한 달 만에 해고했다. ‘업무지시 불이행 및 업무능력 부족’이 이유였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문씨 징계를 부당하다고 결론 짓자 사측은 “식자재 폐기율이 급증해 사용자에게 5,200만 원 상당의 비용 손실이 발생했다”며 재심을 신청하기도 했다. 문씨는 “문제가 있어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더니 수천만 원 손해가 생겼다며 징계를 했다”며 분노했다. 매니저 이씨도 지난해 6월 직위 해제돼 미화 업무에 배치됐다. 이씨는 “회사가 ‘노조’ 냄새를 맡고 징계의 칼날을 휘두른 것”이라 표현했다.
사측이 노조의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건물 외벽에 게시한 현수막. 조합원들에 대한 사측의 횡령 등 고소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됐다.
사측은 식자재 횡령 등을 이유로 노조 조합원들을 징계하고 고발하기도 했다.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이은정씨도 그중 한 명이다. 4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고 사측으로부터 사기, 횡령, 업무 방해 등 혐의로 고소당했다. 돈가스 등 식자재 재고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이를 무혐의 처분했고 지방노동위원회는 징계가 부당하다고 결론 지었다. “연차를 거의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일했던 이씨는 징계 이후 청소 업무에 배치됐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괴산 냉동창고로 발령받았다. 모두 3년 전 어머니의 권유를 받고 구례로 귀촌했을 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다.
사측은 “도둑질, 횡령 감싸는 게 노조 활동인가?”라는 내용의 대형 현수막을 건물 외벽에 걸었다. 딸 이씨보다 1년 먼저 귀촌해 구례자연드림파크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던 어머니 박인숙(61)씨는 “그 현수막을 보고 그 자리에서 현수막에 목을 매고 싶었다”고 말했다.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을 기치로 내건 사측은 딸을 홍보 영상에 출연 시키기도 했었기에 박씨의 분노와 슬픔에는 회사와 생협에 대한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 “나쁘지 않은 직장이 아버지 고향에 있으니 내려와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거짓말한 적 없다” 삐뚤빼뚤 쓴 경위서
한국에 온 지 8년이 된 김연아씨는 7살, 9살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회사는 그를 포함한 5명을 구례에서 괴산 냉동창고로 발령했다. 그가 쓴 소명서(오른쪽). 홍인택 기자
8년 전 지금 배우자를 만나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온 김연아(35)씨에게 구례는 시댁이 있는 곳이자 일곱 살, 아홉 살 두 아이의 고향이다. 구례자연드림파크는 김씨의 한국에서 두 번째 직장. 아침 9시에 식당에 출근해 저녁 11시 30분까지 일하고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어서 틈틈이 식사해야 했지만 김씨는 “주방 식구들을 잘 만나서 좋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노조에 가입하고 사측이 식자재 횡령에 대한 조사에 나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대기발령’, ‘정직 1개월’, ‘소명서’ 같은 생소한 단어의 뜻을 업무를 하지 못하면서 힘겨워지는 생계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식자재 횡령 여부를 묻는 소명서 문항에 “없습니다”, 거짓 해명의 이유를 묻는 문항에는 “거짓말한 적 없다”고 썼다.
김씨는 지방노동위원회를 통해 부당 징계를 인정받았지만, 끝내 괴산으로 발령받았다. 한 번도 밟아본 적 없고, 남편의 친지도 없는 곳. 김씨는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을 회사가 대신 키워줄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분개했다. 사측은 “어느 곳에서 일하든 같은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다”며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괴산에 발령 낸 것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문석호씨의 사원증과 명함에는 아이쿱 생협 로고가 새겨져 있다. 아이쿱 생협은 문제가 생긴 회사와 "법적으로 별개 회사"라는 입장이다.
아이쿱 생협 측은 “구례자연드림파크 내부의 회사들은 아이쿱 생협과 별개의 법인”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생협은 노조가 각종 출판물에 ‘아이쿱 생협’이란 표현을 담자 노조 간부를 두 차례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모두 무혐의로 끝났다. 생협은 그러면서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구례자연드림파크 문제가 거론되자 다른 사업장과 노조가 임금협정을 맺은 사실을 홍보하며 “아이쿱생협이 노동존중사회를 기조로 노동의 가치를 정책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밝히는 모습을 보였다.
계속된 징계로 인한 문씨의 정신적 고통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지만, 고통은 끝날 조짐이 없다. 문씨가 지난해 9월 민주노총 부당노동행위 증언대회에서 노동조합과 관련된 사례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사측은 “회사 명예를 훼손했다”며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정직이 부당하다고 결정했지만 “징계양정”을 재결정하겠다며 문씨에게 인사위원회 출석 통지서를 보냈다. 출석 장소는 구례가 아닌 괴산. “살고 싶다”는 외침 앞에 생협의 ‘상생’ 협동조합 정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 http://icoop.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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